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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권 활동따로 또 같이 꿈꾸는 집 : 전주 비혼여성공동체 비비 방문 후기

모두들청년주거협동조합
2019-04-11
조회수 3986

“같이 사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어요.”

(영화 꿈의 제인 中)


언제나 마지막에는 혼자 남겨지고 마는 소현이 있다. 부모로부터, 애인으로부터, 엄마 팸으로부터 아빠 팸으로부터 혼자 남겨진 소현은 닿지 못할 편지를 쓴다. 영화 <꿈의 제인>은 그 편지를 읽는 목소리로부터 출발한다. 혼자 남겨졌다는 것과 편지를 쓴다는 것은 참 닮았다.

같이 사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며, 대포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소현을 보면서 나는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버림받을까봐서, 미움받을까봐서 훔치지도 않은 생활비를 훔쳤다고 말하고 싹싹 비는 소현을 보면서는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 떠오르려는 걸 다시 꿀떡 삼키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이미 지나간 경험이라 뻔하다고 퉁쳐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생애주기에 맞는 고민을 좀 하라고 구박받기도 하면서 나는 점점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딸이 되었다. 그냥 그런 줄 알라고 통보하는 말하기 방식이 더 편했다. 도저히 모르겠는 게 생겨도 엄마라고 별 수 있겠나 하고 넘어가면 되었다.

결혼을 않겠다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TV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를 틀어놓고, 내조하는 아내가 나오는 소설에 밑줄을 그어서 선물하는 엄마에게, 엄마가 겪은 일은 단순히 남자를 잘못 만나서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떽떽거리기도 했다. 같이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나에게 어떻게 그런 삶을 강요할 수가 있냐고 대못을 박은 날에는 조금은 기뻐서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사람이 넷인데 케이크가 세 조각이 남았으면 어떡해야 된댔지?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먹겠다고 싸우면 안 되는 거야.

누군가를 포기하게 해서도 안 돼.”

(꿈의 제인 中)


같이 살고 싶던 사람이야 늘 있었다. 한 이불 덮고 한 솥밥 먹으면서 오순도순 재미지게 살고 싶던 사람이야 있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내 ‘지랄 맞은 승깔’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의 꼬리엔 언제나 태릉에서의 자취 생활이 있었다.

그 원룸에 나란히 누워서 종종 생각하곤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무를 너는 이해할까? 니가 이야기하는 나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떤 초록색인지, 어떤 갈색인지, 어떤 가지와 어떤 뿌리인지 우리는 평생 이야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끼리도 그런데 남과 사는 일은 오죽할까 싶었다.

초콜릿을 혼자 먹고 싶어서 현관 바깥에 나와 있는 소현에게 제인은 케이크를 나누어준다. 누구도 포기하게 하지 않으면서 케이크를 나눠야 한다는 제인의 말을 들으며 나는 피로해진다. 사람이 넷이고 케이크가 세 조각일 때 자기 몫의 케이크를 포기하는 사람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런 결정을 하는 게 아니니까. 배가 고픈 게 치열한 것보다 훨씬 편할 때가 있는 거니까.

내조하는 아내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동상이몽일 수밖에 없을 밤들이 너무 추워서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내가 밉기도 해서, 아무래도 우리는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나’를 먼저 생각해야 ‘우리’도 생각할 수 있어요.”

(<비혼들의 비행>모임 中)


전주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동부시장까지 버스로 15분, 시장을 끼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아귀가 맞지 않는 나무대문이 나왔다. 잔디로 된 마당과 장독이 올라선 간이 옥상까지 있는 완벽한 한옥, 그리고 밥 짓는 꼬순 냄새

<비혼들의 비행> 방문을 빌미로 처음 만나서 반가운 사람들도 있었고, 그 전부터 알았다고 반가운 사람들도 있어 여행이 살짝 좋아지려고 했다. 점심으로 마파두부 덮밥이랑 버섯볶음을 먹었는데 세상 맛있어서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내가 먹을 수 없는 반찬들 사이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반찬들만 깨작거리지 않아도 되는 밥상. <모두들>에서의 식탁은 늘 이런 식이다. 너무 좋다.

후식으로 자두와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인터뷰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입체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어색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과 어색해서 말이 없는 사람, 잠자리가 험한 사람과 잠귀가 밝은 사람의 만남이라니!

싹싹바른 모습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말을 아끼고 얌전해야 하는 건지, 팸의 모양에 따라 내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소현의 삶은 언제나 조금씩은 삐걱거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마다 야식을 먹는 게 행복한 누구와 자기만의 공간에서 밤을 보내는 게 평안인 누가 있을 때 나는 어떤 나여야 우리의 비비페가 행복할 집일지 계산하는 것은 아귀를 맞추는 온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 행복한 나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것과 이타심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닐거라는 꼬숩고 배부른 생각이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가진 친구를 기다릴 수 있었던 건

그만한 신뢰와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비혼들의 비행>모임 中)



<비혼들의 비행(줄여서 비비)>은 경제력을 가진 30대 비혼 여성들이 모여서 꾸렸던 네트워크이고 1인 1가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모두들>의 삶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여러모로 입주 문턱이 낮은 <모두들>에 사는 나는 당장 오늘과 내일이 위태로운 나일 수도 있고 원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 완벽한 우리를 꿈꾸는 게 중요했던 나일 수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사실 행복한 우리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행복한 나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건 나만의 고유한 경험이라고 그러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맞는 거라고, 마찬가지로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너무 탓할 필요도 없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인정투쟁 없이, 미움받을까봐서 맘 졸일 필요 없이 나 혼자서 튼튼히 두 발 딛고 살아도 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건강한 공동체. 여러 경험의 결이 모이고 흩어지지만 부딪치고 깨지진 않는 공간. 어쩌면 내가 <모두들>을 만난 건 그런 사건이 내게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복선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영화 <꿈의 제인>의 도입, 소현은 오빠가 떠난 모텔 방에 혼자 찾아가 손목을 긋는다. 소현이 까무룩 잠들려고 할 때 제인이 그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갖고 있는 초콜릿을 혼자 먹기 위해 현관 앞에 쪼그리고 있던 소현의 앞에 케이크를 내밀지 않았다면. 소현은 알았을까? 제인이 떠나고 다 같이 둘러앉아 썰지도 않은 김밥을 먹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를.

글쓴이_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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